
소농, 누가 지구를 지켜왔는가? _쓰노 유킨도
내용요약 more.. 1장 '규모확대'라는 태풍속의 소농
이 책에서 말하는 소농은 자급적 집약농업을 하는 농민으로서 오랜 세월에 걸쳐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농지를 만들고, 그 토지에서
열심히 작물을 재배해서 얻어내는 적은 잉여생산이 자손의 번영을 이루는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고, 그 농사법을 자손 대대로
이어온 사람들을 말한다.
쓰노유킨도가 파악한 1991년 당시 일본의 농업정책 방향은 농업의 자본주의적 발전이었다. 이 방향을 충실하게 따르는
'국민적 농민'은 돈을 더 많이 벌어들이기 위해 농지규모를 확대해 나간 농민들이었다. 농민이 이전보다 더 많은 작물을 생산하기
위해서는 농지규모를 확대하던가, 면적당 수확량(단위수확량)을 늘려야만 한다. 하지만 단위수확량을 늘리는 것에는 생물학적인 한계가
있다. 왜냐하면 지구에 공급되는 태양에너지가 지속적이긴 하지만 그 유입량이 일정하고, 또 작물마다 광합성 속도에 있어서 생물
고유의 최고치와 한계효율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작물이 더 오랜 시간 햇빛을 받아 광합성을 한들, 생애주기 또한
한정되어있다. 결국 '더' 많은 작물을 생산하기 위해서는 규모를 확대하는 수밖에 없고, '그' 많은 작물들의 성장단계에 따라
일정기간에 몰리는 많은 양의 작업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고성능 대형농기계에 의존하는 수밖에 없게 되었다. 동시에 비싼 농기계를
사는데 들인 돈과 감가상각을 생각하면 농민은 또 다시 면적을 더 늘려야만 하는 수밖에 없어졌다.
국토가 한정된 일본에서 대농을 지향하는 국민적 농민들은 이농자들이 두고 떠난 땅을 흡수하며 규모를 확대해 나갔다. 여기에
정부의 농업정책방침에 충실한 농협은 생산과 유통과 지원분야에서 소농과 대립적인 위치에 서서 소농의 얼굴을 지워버리고 있다.
거짓말을 입에 달고 사는 정치가, 행정관리들 또한 소농의 편이 아니다. 현대 자본주의사회에서 소농이 살아남기 위한 유일한 길은
소농 생산자, 시민 소비자, 기대하기 어렵겠지만 행정관리, 농협조합장들이 '화폐 아닌 것의 가치', '화폐를 초월한 가치'를
발견하고, 공유하여 그것을 지켜나가는 길 뿐이라고 쓰노유킨도는 말한다.
2장 소농은 풍토를 살린다. 논은 보통 지역, 수계에 따라 한데 묶이곤 한다. 그래서 '무슨 현의 벼'라는
말을 사용하곤 하는데, 정작 따져보면 하나의 강줄기에서도 기온과 수온, 토질이 현저하게 다른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일정 지역, 수계 안에서도 논마다 각기 '풍토'가 다 다르다는 이야기다. 미자와에 의하면 '풍토는 그곳의 대지와 대기의 접점에서
빚어진 순 자연물이다. 따라서 가격이 없기는 하지만, 그래도 지극히 가치가 높은 것이다'라고 이야기했다. 자신의 주변에 있는
흔한 것을 이용하여 높은 가치를 만들어내는 것이, 거대자본이 농가에 가하는 공격을 피하게 하고, 몸을 지키는 무기가 될 수
있다. '벼농사 달력'이나 '재배지침', '토양분석치'를 전적으로 믿고 따를 것이 아니라, 내 논의 풍토를 알고, 그에 맞는
농사법을 찾고, 독특한 가치를 가진 작물을 생산해야 한다는 이야기다.
앞에서도 이야기했지만 일본 농정의 기본은 소농을 살리자는 것이 아니라 소농의 토지를 일부 농가에 집중하여 대규모 농가를
육성하는 것이다. 소농은 망해도 상관없다는 행정, 이에 대응한 농업연구와 기술지도는 실로 무책임하고, 기업우선인 물자의
대량투여로 귀결된다.
'산천풍토와 서로 알게 된' 향토에 뿌리를 내리고 살고 싶다는 농민의 근원적인 요구에 온몸으로 응하고자 한 것이 '미자와
풍토학'의 본모습이다. 철저한 야외조사와 관찰로 파악한 풍토를 살펴보면, 각각의 풍토는 절대로 우열을 가릴 수가 없다. 다만
다양한 풍토를 천혜로서 활용하고, 순응과 조화를 추구할 뿐이다. 자연순응을 중시하는 것은 그것이 가장 경제적이며 또한 개성적인
산물을 생산할 수 있는 합리성에 입각해 있기 때문이다. 물론 환경이 부적당하더라도 필요한 작물을 반드시 만들어야 하는 경우도
있다. 그럴 경우에는 물론 한계가 있겠지만, 적극적인 인간의 노력으로 풍토를 만들어 낼 수도 있다. 또는 해당 풍토에 적합한
품종을 새로 찾아내거나 육종하는 것도 가능한 일이다. 일례로 벼농사 부적지인 훗카이도에서 벼농사를 가능하게 한 것은 바로
'풍토에 적응하는 품종'을 육종해냈기 때문이다.
농산물에 대한 시장의 요구는 풍토적응성과 거리가 멀다. 하지만 농가는 틀에 박힌 품종이 아니라, 지역의 풍토에 적합하고
또 자신의 논에 맞는 품종, 농약을 쓰지 않아도 재배가 가능한 자가품종을 자신의 눈으로 찾아야 한다. 왜냐하면 소비자는 농약에
오염되지 않은 안전한 농산물 또한 원하고 있기 때문이다.
논의 토질은 오랜 시간동안 강과 물이 만든 결과물이다. 하지만 인간의 노력으로 논의 토질을 바꾸어 낼 수 있다는 것을 앞서
이야기했다. 소농의 발전은 타인의 토지를 빼앗아 주위에 울치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가지고 있는 토지를 소중히 다루고 토질을
향상시켜 달성해야 한다. 이는 땅이 가지고 있는 자연력에 인간의 에너지를 축적하는 것을 말한다. 땅에 에너지를 비축하는
행위야말로 소농의 전통을 바르게 계승하는 것이다.
오랫동안 경작해온 땅은 풍토와 인간의 공동제작물이다. 지력의 근원인 토양유기물은 경작에 의해 급격히 소모된다.
토양유기물을 유지하면서 연속경작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바로 집약농경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집약농경에는 많은 노동이 필요하다.
쏟아 붓는 노동만큼 토질이 좋아지고, 풍부한 열매를 약속받는 것을 체험할 때 사람은 그 행위에 빠져든다. 앞서 이야기한 '화폐를
초월한 가치' 다시 말해 '경제를 초월한 세계'가 열리는 것이다. 이러한 세계는 향토에서 바르게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 향토를
사랑해서 끝없이 땅의 가치를 높이고, 그곳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소농에게만 허락되어 있다.
3장 농경의 변천과 그 계기 집약적 농법의 원리는 자연활동을 인간활동으로 바꾸려는 영속적농법의 실현이다.
인간이 경지면을 평탄하게 만들고, 땅을 잘 갈고, 새로운 품종을 만들어내고, 돌려짓기와 사이짓기를 하고, 유기물을 풍부하게
공급하는 활동은 바로 자연의 준평원화 작용, 풍화작용, 생물다양성, 생태계의 자기시비 기능을 그대로 옮겨온 것이다. 이와 같은
자연을 닮은 인간의 노력이야말로 지속적인 농업을 가능하게 만든다.
농경의 변천을 살펴보자. 한정된 토지에서 점점 늘어가는 인구를 먹여살리기 위해서는 작물의 단위수확량을 높여 농지의
토지이용률을 향상시켜야 한다. 그래서 인간은 집약재배와 다모작, 사이짓기를 실시해서 식량생산량을 늘렸지만 한편으로 지력은 점점
약해져 갔다. 그래서 휴한법, 윤작법, 녹비와 축분, 인분 공급 등의 방법으로 지력을 회복하고 유지하는 노력을 실행하였고, 한번
더 단위수확량을 일정부분 증가시켰지만 식량생산의 증가는 또 다시 인구증가를 초래하게 만들었다. 결국 종래의 재배법과
지력유지법만으로는 생산량을 늘리는 것에 한계에 이르렀고, 화학비료를 축으로 한 근대농법으로 전환하게 되었다.
화학비료의 보급으로 일본의 작물단위수확량은 현저하게 향상되었지만 이는 농약사용이라는 필연적인 숙명을 가져왔다. 인구증가에
따라 더 많은 식량이 생산되어야 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절제하지 못한 인간의 욕망은 보다 '더' 많은 식량을 생산하기 위해
'비료와 농약 사용'이라는 넘어서는 안 되는 선을 넘게 만들었다. 다시 말해 자연을 닮지 않은 인간의 노력이 이제는 영속적인
농업을 불가능하게 만들어버린 것이다.
근대의 시작으로 농지는 자급농산물을 생산하는 터전이 아니라, 상품으로서의 농산물을 생산하는 제조공장으로 변했다. 옛
식민지 나라들의 경우, 그 여파로 인해 전통농업이 단절되고 자국내 농업의 균형구조가 심각하게 훼손되었다. 식민지시대 농업의
모습은 오늘날 자본주의시대 농업의 모습과 맥을 같이 한다. 식민지국가 농민의 피땀과 지력 손실, 농업 불균형이 종주국을 살찌운
것처럼, 오늘날 한 나라 안에서도 농산물 제조공장의 이익이 농촌과 농민이 아닌 외국자본이나 도시에 있는 국내자본가에 흡수되는
식민지형 농업이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
자연파괴에 대한 책임은 누구에게 있을까? 단기적인 경제이익을 위해 화학비료와 농약을 다량으로 사용해 생태계를 파괴하는
대규모 농가와 이 행위를 묵인하는 아니 부추기는 자본주의 사회체제에 있다. 그에 반해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땅에 뿌리를 박고
살면서 표토의 유기물 함량을 유지하며 수백년이나 식량생산을 계속해온 집약소농의 활동은 실로 예기치 않게 인류 생존의 기초인 땅을
지키며 지구환경을 지켜왔다.
4장 소농의 의의를 탐색한다 쓰노 유킨도는 전통농업 안에 자본의 이론을 뛰어넘는 인간의 행동원리가
내재되어있다고 믿었다. 자본주의 사회는 경제적인 겉모습은 풍요롭지만 인간적인 속 모습은 몰락의 길을 걷고 있기 때문에, 인간을
지탱하는 존재의의를 탐색하기 위해 시대를 뛰어넘는 인간 행동원리를 농경에서 발견해야 한다고 말한다. 상인의 눈이나
위정자의 눈과 달리, 농업, 농민의 문화적 측면, 자연과학적측면을 뚜렷이 의식한 '제 3의 눈'이라는 것이 있다. 대상 속에서
경이로움을 발견하고 그 의미를 고찰하는 제 3의 눈이 가진 시각을 포용하고 또 그것을 뛰어넘는 제 4의 눈이 있는데, 그것은
'소농의 입장에서 세계를 객관적으로 살펴보고 기술할 수 있는 시각'을 말한다. 인간존재를 가치 있게 하는 보편원리를 농경에서
파악하기 위해서는 바로 이 '제 4의 눈'이 필요하다.
농업에는 '노동을 즐거움으로 바꾸는 기술'이 숨어있다. 농부는 끊임없이 땅을 손질하고 작물을 보살피는 고된 일을 하는
동안 무아의 경지에 들어가고, 거기에서 각성하는 순간 노동의 성과를 돌아보며 아름다움을 느낀다. 이러한 과정을 여러 일생이
세대에 걸쳐 오랫동안 반복하며 쌓은 노력이 집약농업지대의 경관을 형성한다. 제 4의 눈은 그 곳의 풍경 속에서 조상의 영혼이
참여함을 확실히 파악하고, 타관 사람의 눈이 미치지 못하는 신비한 아름다움을 느낀다. 소농은 그렇게 일상생활에서 흙 위에
아름다움을 새기고, 무심히 그것을 감상하는 행위를 반복하고 있다.
저자는 이르기를, 농업경관의 근본은 도시경관과 궤를 같이 하는 '인공'이며, 인공질서의 확인과 전망이 아름다움으로
의식되고, 질서의 혼란이 추함이라고 말한다. 농업 자체가 자연을 배제한 인공, 인위의 세계이므로 농업경관이라는 것은 토지를
매개로 사람과 자연의 대항관계가 전개되는 양상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저자가 밝히는 농의 미의식은 인간이 의지를 가지고 구축한
질서는 미로 받아들이고, 이 질서의 혼란을 추로 받아들인다.
저자에 따르면, 사람은 의지의 힘으로 제어할 수 없는 정념을 가지고 있다. 정념이란 정신의 수동적인 상태의 감정으로서
인간이 본래가지고 있는 동물정기에서 오는 욕망이라고 하였다. 이 정념의 분출, 해방에는 두 가지 모습이 보일 수 있다. 하나는
조상신, 자연신의 시선을 의식하며 땅을 항해 그 정념을 발산하고, 표토를 풍요롭게 만드는 집약농경민의 모습이고, 또 하나는
아무런 양심의 가책이나 내부규제 없이 생산 환경을 파괴하고, 농약투성이 생산물을 시장에 내는 대농의 모습이다. 저자는 만약
소농으로부터 동물정기를 제어하는 고매한 정신을 키우는 방법을 발견하지 못한다면, 지금의 도시문명은 욕망이 빚어내는 투쟁 때문에
얼마가지 않아 붕괴할 것이라고 말한다.
저자가 파악하고 비판한 당시 일본의 농업과 사회의 흐름을 오늘날 내 주변에서 발견하는 일은 정말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저자가 책을 펴낸 1991년이나 지금 2008년이나, 일본이나 여기 한국이나 별 다를 것 없이 여전히 자본주의 틀 속에서 농장의
규모는 계속 커지고 있고, 농민의 수는 줄어들고 있다. 이와 맞물려 이제는 석유와 화학이 없이는 아예 농사짓기가 불가능한 세대가
되어버렸다.
저자가 1장부터 3장까지 밝힌 농업 규모화 현실에 대한 문제제기, 풍토를 살리며 지구를 지켜온 소농의 역할과 전망,
농경의 변천사와 그 계기에 분석에 대해 내가 이해한 수준에서 전적으로 동의한다. 때문에 저자가 이야기하는 대로 '소농'이야말로
농업뿐만 아니라 지구를 지키는 일에 유일한 대안이라는 것을 새삼 확인했다. 하지만 4장 소농의 의의를 탐색하는 내용 중에 '농의
미의식'에 대한 부분이나 '인간의 정념'에 대한 부분은 쉽게 이해가 안가고, 수긍이 잘 안가는 부분이라 좀 더 오래두고
살펴봐야겠다. 단지 4장의 내용을 더 잘 이해하고 싶거나 수긍하지 못하는 부분에 대해 반박하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내가 무엇을
근거로 또 어떤 소농의 모습으로 그 삶을 계속해 나가야 하는지 온전히 밝히고 싶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중에는 내 자신과 아이들과
주변의 이웃들에게 소농의 삶이야말로 인간 본연의 삶의 모습이라는 것을 말로, 삶으로 증명해 낼 수 있으면 좋겠다.
마지막으로 쓰노유킨도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앞으로 내가 소망하는 농부의 모습을 그려보았다. 풍토를 알고 자연을 닮은
방식으로 풍토를 바꾸어 낼 수 있는 농부, 작물의 성질을 알고 자연을 닮은 방식으로 작물을 건강하게 키워낼 수 있는 농부,
힘닿는 만큼의 적절한 규모에서 내 손으로 가족을 먹여 살릴 수 있는 농부, 그래서 바라고 애쓰고 수고하는 일이 주위의 이웃들에게
해가 되지 않고 도움이 되는 농부가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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